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샌델 (문단 편집) === 능력주의 비판 ===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 당선 등을 불러온 [[포퓰리즘]] 열풍은 전문가가 말하듯 이민자에 대한 혐오나 세계화에 대한 불안 때문만은 아니다. 포퓰리즘 열풍은 [[기술관료]](technocracy)의 가치 중립 태도가 불러온 공공 담론의 공동화[* 여기서 조심해야 될 점은, 기술관료를 덜 뽑거나 뽑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기술관료의 말을 믿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기술관료가 사실로써 정치적 담론을 원천 봉쇄 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이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사회나 정치에 받아들여질 때는, 그 사실이 학자들의 담론을 통해 검증된 것으로만 충분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 각자는 이 사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시민 사회의 담론과 정치적 검증을 한 번 더 거쳐야 된다는 것이다.]와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meritocracy)적 돈의 가치로 나누는 오만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발(backlash)로 생긴 것이다. 기술관료 시스템을 통한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하였지만 사람들은 세계화가 초래한 불평등을 참아왔다. 그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기회가 평등하면 재능과 노력에 따라 누구나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통계는 (한때 그것을 가능하게 했었던) 능력주의 사회가 더 이상 사회적 상승(계층 이동)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이에 따라 능력주의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이를 능력주의 신화라고 하며, 능력주의 신화에서 깨어난 대중들은 기존 엘리트에 대한 반발로 포퓰리즘 투표를 하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능력주의는 돈의 가치로 직업과 대학을 서열화함으로써 승자와 패자를 나누며,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감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 배분을 맡되, 대중들에게 굴욕감을 선사하는 '너의 성취는 너의 능력 덕분이다',[* '너의 성취는 너의 능력 덕분이다'는 생각은, 능력주의 미덕 가치관(능력주의 윤리)이다. 샌델은, 엘리트들에게 '너의 성취는 너의 능력 덕분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극심한 반발을 하는 것처럼, 반대로 저학력자나 중산층들에게 '너의 성취는 너의 능력 덕분이다.'라고 말하면 극심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말한다. 전자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비하로 느껴지며, 후자는 자신의 타고난 능력에 대한 비하로 느껴진다. 노력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타고난 능력은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이런 점에 저학력자들과 중산층들은 엘리트들보다 모욕에 대해 심한 무력감과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 '당신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능력주의적 미덕 가치관 자체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직업' 부분에서 능력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스스로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성공관이 되어 버렸는지 알아보는 데서 시작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능력주의 교육은 더 이상 사회 계층 이동에 기여하고 있지 않다.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으며,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 점수는 올라간다. 이런 상황에서 고등 교육의 승자 독식형 재선별[* re-sorting: 고소득 가정의 학생들이 가장 경쟁률이 높은 대학을 찾기 시작하면서, 대학 간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현상. 한국으로 치면, '대학 줄 세우기'가 된다.]이 나타나며, 이는 학업 지원에 대한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을 유도하고, 재능과 부의 대물림을 심화시킨다. 이로서 더더욱 계층 이동은 사라지고 엘리트층은 굳어진다. 경쟁을 통과한 엘리트들 또한 조금의 실수도 허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통제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해지는 정신적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이를 '완벽주의'라고 한다. 이 습관은 그들이 승리자가 된 이후에도 그들을 괴롭히며 한편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삶에 대한 불안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우울증에 빠지게 만든다. 여기서 샌델은 대학 입시에 있어서 운(luck)적 요소의 도입이 '내 성취는 나의 능력 덕분이다'는 능력주의적 사명을 깨뜨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제언한다.[* 샌델은 능력주의 가치관의 윤리적 문제점 해결 방안 중 하나로, 그 일을 수행할 적절한 한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 가운데 '''추첨제'''로 뽑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능력주의 가치관은 운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은폐하고 우리의 위치를 순수한 개인적 성취로 포장하게 하기 때문에, 교육과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 어느 정도 행운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방안으로 (자격에 근거한) 추첨제를 시도하는 것.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다만 여기서 샌델은 능력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유능력자 제비뽑기"(자격제)를 말함으로써 '수정 능력주의'적 관점을 취한다.] 또한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시험 점수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고 그 직업은 돈의 가치에 따라 서열화된다. 이는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 직업인들의 일에 비해 시장에서 별 가치가 없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진다. 저학력자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닫고는 엘리트들에 대한 [[백래시]]로 포퓰리즘을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직업에 있어서 '돈을 얼마나 벌고 쓰느냐'는 '소비자의 역할'에 존중을 두지 말고, 우리 사회에 '생산자로서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를 두고 그 직업을 존중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샌델은 말한다. 샌델은 능력주의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는 해답이 '조건의 평등'에 있다고 주장한다. 샌델이 말하는 '조건의 평등'은,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이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과 부를 가져야 된다는 '결과의 평등'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회의 평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p.348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정적 원칙이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은 아니다." 즉, '기회의 평등'도 필요한 건 맞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조건의 평등'인 셈.] '조건의 평등'이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계층일지라도 공공의 삶 속에서 이해관계를 공감하며 공동선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민주주의적인 평등의 눈으로 고개를 들고 서서 동료 시민들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 방식과 문화를 배우는 것에 대해, 충분한 민주주의적 접촉 기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Now, what I mean by equality of condition is not that everyone must have the same income and wealth but there does need to be broad democratic access to sources of learning to the culture and to a way of being that enables everyone whatever their walk in life to stand with their head up to look their fellow citizens in the eye as democratic equals to deliberate about the common good to feel a stake in the common life. [[https://youtu.be/ny-9ky6OmTw?t=1494|#]]] 즉 '''공공의 삶에 대해서 민주주의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그래서 공동체 속 자신과 다른 구성원들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 사회적 역량을 길러주는 그런 시민 교육에, 계층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충분히 접촉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등'''을 뜻하며, 이는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